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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공예의 마지막 장인, ‘김육남’ | 관리자 | 2011-07-17 08:44:22 원문 URL : http://haenam.com/bbs/?tbl=human&mode=VIEW&num=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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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일각의 명인 평범한 얼굴, 순박한 웃음, 유난히 반짝거리는 눈을 가진 사람. 그가 해남 유일의 옥공예 장인 김육남 씨다.
옥동마을 해남읍에서 차로 20여 분을 달리면 해남 옥동마을이 나온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도로 왼쪽 조금 들어간 장소에 폐가처럼 서있는 ‘옥공예 전시판매장’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30여 미터를 더 가면 도로 왼쪽에 아담하고 깨끗하게 지어진 건물 한 채를 볼 수 있는데 이곳이 김육남 씨 부인이 운영하는 ‘화신공예’, 옥공예 판매장이다.
옥과의 인연 김 씨는 강진 태생이다. 그런 그가 옥에 대해 알게 된 것은 9살 때였다. 마침 옆집에 해남 화산에서 강진으로 시집오신 할머니가 살고 계셨는데 그 할머니 김 씨에게 옥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때부터 김 씨는 일 년에 한 두 차례 옥동에 들려 옥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나갔다.
“초등학교 시절이었어. 아버지가 집을 비우신 사이 마을 이장님을 집을 찾아오셨는데 도장을 달라 시는 거야. 아버지가 출타를 하셨으니 어린 내가 도장을 어떻게 찾겠어. 그래서 재미삼아 도토리에 아버지 도장을 새겼어. 그렇게 해서 임시 도장으로 썼지. 아버지 도장을 손수 팠으니 어린나이에 얼마나 기뻤겠어. 그 때부터 적극적은 도장 파는 일을 한 거지.” 김 씨의 선친은 젊은 시절 서당 선생님을 하셨고 나중에는 짚공예를 하셨다. 김 씨는 부친이 50세 되던 해에 태어났는데, 김 씨 집안의 여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해서 이름을 김육남이라 지었다고 한다. 김 씨는 이런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부터 공예를 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의 재주는 부친의 솜씨를 물려받았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도토리로 도장을 팠었는데 하다 보니 좀 시시하더라고. 누가 쎄돌이 좋다고 해서 쌔돌로 도장을 파다가, 11살 때부터는 옥돌로 조각을 하기 시작했어. 옥돌에 도장도 세기고 토기, 호랑이, 자동차 같은 모양들을 새기는데 잘되기도 하고 재밌더라고.” 김 씨는 이렇게 다져진 실력을 가지고 옥공에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옥동을 찾았다. 그가 처음 취직한 곳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병석 씨 가계였다. 처음이라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6개월 정도를 일한 다음, 부곡리 한종준 씨 옥공예 기술자로 가게 된다. 이곳에 약 2년 정도 일을 했다. 그 후 김 씨는 75년까지 이 점포 저 점포를 옮겨 다니게 된다. 그러다 1976년, 남의 점포 종업원으로 일한지 7년 만에 자신의 점포를 갖게 된다. 김 씨는 자신의 점포를 차렸지만 간판은 달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점포에 간판을 단 것은 1988년, 점포를 차린 지 12년 만의 일이었고, 결혼을 한 후의 일이었다. 옥공예 과정 옥공예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제작하고자 하는 형태에 적합한 원석을 골라야 한다. 이때 가공하자고 하는 작품과 동일한 원석을 이용하게 되면 재료의 낭비를 줄일 수 있고 가공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납작한 원석은 거북이, 둥근 형태의 원석은 두꺼비, 사각이면 호랑이를 제작하는데 적합하다. 원석을 고르는 작업은 그만큼 중요하다. 원석을 골랐으면 에어 컴프레서를 이용해 불필요한 부분을 쪼개 내거나 절단기를 이용해 절단 한다. 이렇게 해야 조각칼로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는 수고를 덜 수 있다. 원석이 원하는 형태를 어느 정도 갖추게 되면 조각칼을 이용해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낸다. 정밀한 작업이라 여기서 실수하면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원석에 대한 김육남 씨의 생각 김 씨는 “옥공예에 필요한 국내산 원석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연옥을 캐기 위한 목적으로 광산을 개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김 씨의 경우는 광산에서 다른 광물을 캐다 우연히 발견된 연옥을 구입해서 쓰고 있다고 했다. 우리 것에는 한국의 얼이 담겨야 김 씨는 “외국에서 수입해온 제품들을 보면 훌륭한 작품도 간혹 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의 문화가 달라 외국산 제품에 대해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것. 우리나라 항아리는 후덕한 옛날 맏며느리의 엉덩이처럼 펑퍼짐 한데 비해 외국에서 수입되는 것은 작고 가볍다고 했다. 김 씨는 이런 현상을 “한국인의 얼이 담기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주장한다. <윤승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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