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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l version="1.0" encoding="utf-8"?><rss version="2.0"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channel><title>사람들 게시판의 최근글</title><link>http://haenam.com/bbs/?tbl=human</link><description>사람들 게시판에 올라온 최근글을 RSS 리더기로 볼 수 있습니다.</description><generator>GN Board RSS Generator</generator><item><title>해남 '한듬 봉사회'를 찾아서</title><link>http://haenam.com/bbs/?tbl=human&amp;mode=VIEW&amp;num=17&amp;category=사회</link><description>&lt;p&gt;쓸고 닦고, 또 꺼내서 치우기를 반복......, 그래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시골 세간이 많으면 얼마나 많으랴 만은 막상 손대고 보면 호락호락한 세간살이는 별로 없다. 몇날 며칠을 할 수 있다면 쉬엄쉬엄 쉬어가면서 할 수도 있겠지만 짧은 가을 해가 넘어가기 전에 마쳐야 하는 일이라 보통 바쁜 것이 아니다.&lt;/p&gt;&lt;br /&gt;
&lt;p&gt;가을햇살이 따사로운 23일, 대한적십사 ‘한듬 봉사회’와 ‘우슬 봉사회’가 마산면 금자리에 모였다. 몇 달 전부터 봉사 대상으로 물색해둔 임 할머니 댁 집수리를 위해서다. &lt;/p&gt;&lt;br /&gt;
&lt;p&gt;임 할머니 집은 60~70년대에 지어진 집으로, 아담하고 작은 마루에 크고 작은 방 세 칸이 달린 농촌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특징이라면 옛날 흙집처럼 지붕이 낮고, 슬레이트 대신 지붕에 함석을 올린 집이라는 점이다. 얕은 처마에는 올 봄 이주해간 제비집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오른 쪽 작은 방은 구들장은 푹 꺼져 있어 사람이 기거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임 할머니는 왼쪽 방을 주방으로 쓰고 있었고 비교적 넓게 보이는 가운데 방에서 기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오늘 계획은 봉사회 회원들이 임 할머니가 모든 방을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리모델링에 가까운 수리는 하는 것이다. &lt;/p&gt;&lt;br /&gt;
&lt;p&gt;일을 시작하기 전 ‘한듬 봉사회’와 ‘우슬 봉사회’가 각자 역할 분담을 했다. 한듬 봉사회는 집안 청소, 가재도구 청소, 주방 청소를 맡았다. 한듬 봉상회 회원 중 일부는 주방 기구를 수돗가로 들고 나와 깨끗이 씻었다. 일부는 마당으로 들어내지 못한 씽크대를 들춰가며 내용물을 정리하거나 청소하는 일을 맡았다. 또 다른 회원들은 방에 남겨진 가재도구를 물걸레로 정성껏 닦았다.&lt;/p&gt;&lt;br /&gt;
&lt;p&gt;그 시간 ‘우슬 봉사회’ 회원들은 ‘한듬 봉사회’ 회원들과 같은 영역에서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일부는 벽과 천정 도배를 하고 있었고, 일부는 전기 배선을 손보고 있었다. 또 다른 회원들은 꺼진 구들장을 손보기 위해 마당에서 모래와 시멘트를 배합하고 있었다.&lt;/p&gt;&lt;br /&gt;
&lt;p&gt;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듬 봉사회’ 회원 문 모 씨는 ‘우슬 봉사회’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은 '한듬 봉사회'에 가입 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전제한 뒤, 많은 봉사단체와 함께 봉사활동에 참여해 보았지만, 이렇게 ‘우슬 봉사회’처럼 자신의 몸과 기술로 일하는 봉사단체는 흔치 않다고 강조했다.&lt;/p&gt;&lt;br /&gt;
&lt;p&gt;금자리 마을 부녀회장도 공사 현장을 찾아왔다. 공사가 어떻게 진행 되는가도 보고, 이곳을 찾아 봉사활동을 해주는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란다.&lt;/p&gt;&lt;br /&gt;
&lt;p&gt;어느 순간 현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 추가로 장판을 깔아야 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 같다. 예산이 추가되는 일이라 ‘한듬 봉사회’ 회장인 황미향 씨의 질문이&amp;nbsp; 몇 마디 이어졌다. 그러나 특별한 절차 없이 좋은 방향으로 결정된 것 같다.&lt;/p&gt;&lt;br /&gt;
&lt;p&gt;황미향 회장은 집수리에 필요한 비용은 일 년 새우젓 장사를 해서 남긴 이익금으로 충당한다고 했다. 그리고 부족한 금액은 봉사회 회비에서 지출한단다. 빠듯한 살림에 1년에 2회 정도 봉사활동에 참가하다 보니 예산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단다.&lt;/p&gt;&lt;br /&gt;
&lt;p&gt;봉사 현장을 보고 지나가던 마을 주민이 말했다.&lt;br&gt;“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요.”&lt;br&gt;“예?”&lt;br&gt;“이렇게 집수리도 해주고, 마을에 점심도 주고 하니 말이오.”&lt;br&gt;“세금이 많이 들 텐데......,”&lt;/p&gt;&lt;br /&gt;
&lt;p&gt;동네 주민은 세금으로 집을 수리하고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lt;/p&gt;&lt;br /&gt;
&lt;p&gt;일에 열중하다 보니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런데도 점심시간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 남았다. 구들장에 미장하는 일이다. 시멘트는 굳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 일을 마쳐야만 순조롭게 오늘 내에 집수리를 마칠 수 있다. 그래서 우슬 봉사회 회원들 일부는 마당에서 양동이에 시멘트를 담아 방으로 나르고 미장 전문가인 김 씨는 방에서 꺼진 구들장을 수리했다.&lt;/p&gt;&lt;br /&gt;
&lt;p&gt;점심은 금자리 마을회관에 차려졌다. 한눈에 봐도 정갈하고 맛있게 보이는 점심이었다. 이 점심은 한듬 봉사회 회원인 백경식당 사장님이 후원한 것이란다. &lt;/p&gt;&lt;br /&gt;
&lt;p&gt;점심 식사를 마친 봉사회 회원들은 각자로 자리로 돌아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까지 집수리에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한듬 봉사회’와 ‘우슬 봉사회’의 오늘 일정이 마무리되고 있었다.&lt;/p&gt;...</description><category>사회</category><author>관리자</author><pubDate>2014-11-24 06:53:15</pubDate></item><item><title>한영자 한국국악협회 해남지부장, “실력 있는 후학 양성에 힘 쏟을 것” </title><link>http://haenam.com/bbs/?tbl=human&amp;mode=VIEW&amp;num=16&amp;category=예술</link><description>&lt;p&gt;한영자 한국국악협회 신임 해남지부장이 국악협회에 대한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lt;/p&gt;&lt;br /&gt;
&lt;p&gt;한국국악협회 해남지부는 지금까지 행정가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으나 한 지부장이 새로 취임하면서 실기 능력을 갖춘 인사가 국악협회를 이끌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 지부장은 그에 걸맞은 협회로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lt;/p&gt;&lt;br /&gt;
&lt;p&gt;한 지부장은 먼저, 회원 간의 반목과 불미스러운 일로 땅에 추락한 국악협회의 명성을 되찾는 일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해남국악협회는 그동안 끝임 없는 잡음으로 군민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한 지부장이 이런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lt;/p&gt;&lt;br /&gt;
&lt;p&gt;한 지부장은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되살리는 일에 온 힘을 쏟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그는 우리 주변에서 하나 둘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가 너무 아깝고 이런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계승하거나 복원하는 일에 힘을 쏟겠다는 것이다.&lt;/p&gt;&lt;br /&gt;
&lt;p&gt;한 지부장은 국악협회가 전문국악인이든 동호인이든 가리지 않고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밝혔다.&amp;nbsp;많은 분들이 국악협회에 참여해 재미있고 즐거운 국악협회가 되었으면 한다는 소망도 내비췄다.&lt;/p&gt;&lt;br /&gt;
&lt;p&gt;그는 또 국악협회가 나서서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실력 있는 인재를 키워 해남의 국악 실력을 전국에 알리고 해남국악의 맥을 잇게 하겠다는 것이다. 한 지부장은 협회차원에서 이 같은 교육을 하겠다고 말했다&lt;/p&gt;&lt;br /&gt;
&lt;p&gt;한 지부장은 '해남국악대전'을 전국에서 명성 높은 대회로 키우겠는 포부도 밝혔다. 그는 현재 해남국악대전 최고의 상이 국무총리 상이어서 앞으로 대통령상으로 격상이 꼭 필요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국악협회 회원뿐만 아니라 행정과 군민 그리고 언론의 지원이 필요하다고&amp;nbsp;강조했다. 한 지부장은 이런 노력은 전임 김동석 지부장 재임 시부터 노력해 오고 있는 일이라며 자신이 꼭 이루어 내겠다고 말했다.&lt;br&gt;&lt;br&gt;한 지부장은 광주여자 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 사회복지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lt;/p&gt;&lt;br /&gt;
&lt;p&gt;그는 대통상 수상자끼리 겨루는 대회에서 천하명무상을 수상했으며 태평무 이수자, 설장고춤 이수자, 경남교방굿거리 이수자, 고법 추정남 선생 이수자이기도 하다.&lt;/p&gt;...</description><category>예술</category><author>관리자</author><pubDate>2014-03-27 02:02:57</pubDate></item><item><title>'밸리댄스’에 푹 빠진 진도 세 모녀</title><link>http://haenam.com/bbs/?tbl=human&amp;mode=VIEW&amp;num=15&amp;category=스포츠</link><description>&lt;p&gt;어둠이 짙게 찾아드는 시간이면 정지숙 원장이 운영하는 밸리댄스 학원에 원생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일을 마치거나 집에 있다가 오후 강의 시간에 맞춰 밸리댄스를 추러온 원생들이다. 그런데 원생들의 연령대를 가늠하기 어렵다. 초등학생에서부터 할머니뻘 되는 수강생들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밸리댄스는 나이를 가리지 않는 운동인 것 같다.&lt;/p&gt;&lt;br /&gt;
&lt;p&gt;댄스복을 갈아입은 수강생들이 정면에 설치된 거울을 기준으로 길게 늘어선다. 자신의 모습과 자세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 다음 소형 녹음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밸리댄스를 추기 시작한다.&amp;nbsp; 원생들의 댄스가 진행되는 동안 카랑카랑한 정 원장의 목소리가 이따금 음악을 뚫고 원생들을 압도한다.&lt;/p&gt;&lt;br /&gt;
&lt;p&gt;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예정된 수업 시간을 채운 수강생들이 하나 둘 떠나고 나자 원생 몇몇만 남았다. 이렇게 남은 이들이 정 원장에게 밸리댄스 지도자 과정을 밟고 있는 수강생들이다.&lt;/p&gt;&lt;br /&gt;
&lt;p&gt;그들은 모두 6명으로 박효진(초3), 한지연(중1) 양, 그리고 이관순(55세), 박정미, 박효정 씨 세 모녀이다.&lt;/p&gt;&lt;br /&gt;
&lt;p&gt;박효진, 한지연 양은 정 원장이 초등학교 방과 수업에서 만난 학생들이다. 그런데 본인들이 밸리댄스를 너무 좋아해 밸리댄스 강사를 희망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정 원장으로부터 밸리댄스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다.&lt;/p&gt;&lt;br /&gt;
&lt;p&gt;이관순 씨는 밸리댄스 경력 3년 차이다. 그리고 지도자 과정의 수강생 중 나이가 가장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밸리댄스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가 밸리댄스를 사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lt;/p&gt;&lt;br /&gt;
&lt;p&gt;그녀는 주변 사람의 권유로 밸리댄스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에게 밸리댄스를 권유했던 사람은 지금 밸리댄스를 그만 둔 상태고 자신은 밸리댄스가 너무 좋아 지도자 과정을 밟고 있다고 말했다.&lt;/p&gt;&lt;br /&gt;
&lt;p&gt;그녀가 밸리댄스를 그만 둘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녀는 밸리댄스를 한 뒤로 건강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리고 중년의 여성답지 않게 몸매가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모델처럼 자세가 교정되어 어느 장소에 나가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lt;/p&gt;&lt;br /&gt;
&lt;p&gt;이런 이유로 그녀는 자신의 딸들에게 밸리댄스를 권유했고 현재 큰 딸, 둘째 딸과 함께 밸리댄스 지도자 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lt;/p&gt;&lt;!--StartFragment--&gt; &lt;br /&gt;
&lt;br /&gt;
&lt;p class=&quot;0&quot; style=&quot;background: rgb(255, 255, 255); mso-pagination: none; mso-padding-alt: 0pt 0pt 0pt 0pt;&quot;&gt;&lt;span style=&quot;background: rgb(255, 255, 255); mso-fareast-font-family: 함초롬바탕;&quot;&gt;그녀는 &lt;/span&gt;&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background: rgb(255, 255, 255); letter-spacing: 0pt; font-family: 함초롬바탕; mso-font-width: 100%; mso-text-raise: 0pt;&quot;&gt;&quot;&lt;/span&gt;&lt;span style=&quot;background: rgb(255, 255, 255); mso-fareast-font-family: 함초롬바탕;&quot;&gt;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딸들과 함께 밸리댄스 추겠다&lt;/span&gt;&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background: rgb(255, 255, 255); letter-spacing: 0pt; font-family: 함초롬바탕; mso-font-width: 100%; mso-text-raise: 0pt;&quot;&gt;&quot;&lt;/span&gt;&lt;span style=&quot;background: rgb(255, 255, 255); mso-fareast-font-family: 함초롬바탕;&quot;&gt;는 말로 그녀의 밸리댄스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lt;/span&gt;&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background: rgb(255, 255, 255); letter-spacing: 0pt; font-family: 함초롬바탕; mso-font-width: 100%; mso-text-raise: 0pt;&quot;&gt;.&lt;/span&gt;&lt;/p&gt;...</description><category>스포츠</category><author>관리자</author><pubDate>2014-03-13 03:58:17</pubDate></item><item><title>노래와 봉사는 나의 운명</title><link>http://haenam.com/bbs/?tbl=human&amp;mode=VIEW&amp;num=14&amp;category=문화/예술</link><description>&lt;p style=&quot;margin: 0px&quot;&gt;&amp;ldquo;우리가 &amp;lsquo;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고&amp;rsquo;란 말을 많이 하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amp;lsquo;노래에 살고 노래에 죽는다&amp;lsquo;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제가 그만큼 노래를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의미겠죠?&amp;rdquo;&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다연 씨는 노래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사랑과 죽음, 그리고 삶과 죽음에 빗대어 설명했다. 강조하듯 흘리듯 이어가는 그녀의 얘기 속에서 노래에 대한 그녀의 절절한 집념은 읽을 수 있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세상물정을 모르던 어린 시절, 그녀는 가수의 꿈을 처음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을 키워갔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은 그녀를 다른 길로 내몰았다. 그래서 그녀는 가수의 꿈을 접어야 했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흘려보냈을까? 마침내 그녀에게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amp;lsquo;KBS 도전 주부가요스타&amp;rsquo;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처음 일승을 했다. 모두들 우연이거나 운이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2승, 3승 그리고 마침내 4연승을 달성하게 된다. 그동안 그녀를 무겁게 짖누르고 있던 장애물이 순식간에 걷히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실력이 검증된 것이다. 그 순간 잠자던 그녀의 꿈이 비로소 날개를 펴기 시작한 것이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사람들은 다연 씨를 향토가수라고 부른다. 향토가수는 전 국민에게 알려지지 못하고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가수들을 말하는데, 다연 씨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하지만 다연 씨는 자신의 싱글 음반을 발표한 엄연한 가수이다. 가수 활동으로만 따지만 중견의 가수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불혹을 넘긴 나이에 처음 음반을 발표한 까닭에 신인 아닌 신인가수인 것이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그녀가 발표한 곡은 &amp;lsquo;당신이 미워요&amp;rsquo;, &amp;lsquo;이별만은 안 돼요&amp;rsquo;이다. 작곡가 김정길 씨가 작사 작곡한 &amp;lsquo;당신은 미워요&amp;rsquo;는 하룻밤 풋사랑에 대한 내용을 담은 곡으로, 이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을 경쾌한 리듬에 실었다. &amp;lsquo;이별만은 안 돼요&amp;rsquo;도 김정길 씨의 곡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했을 때 느끼는 좌절감을 가사에 담아내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두 곡 모두 이별을 소재로 하고 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다연 씨는 &amp;lsquo;당신이 미워요&amp;rsquo;란 곡이 상승세를 타고 있어서인지 한층 고무된 분위기다. 그녀는 &amp;ldquo;가사가 슬픈 곡인데도 불구하고 리듬이 경쾌해서 그런지 팬들이 너무 좋아해 주셔서 뜨고 있다&amp;rdquo;며 &amp;ldquo;덕분에 지역방송에 초대가수로 가게 되어 너무 기쁘다&amp;rdquo;고 말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다연 씨는 개인적으로 &amp;lsquo;이별만은 안 돼요&amp;rsquo;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이 노래의 가사가 그녀의 삶을 반추해 주기 때문이란다. 다연 씨가, 아니 우리 모두가 한번은 겪었을 법한 사건을 이 노랫말이 대신해 주고 있단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그녀는 아직 미발표작인 &amp;lsquo;천리 길 사랑&amp;rsquo;의 음원 제작을 끝냈다. &amp;lsquo;천리 길 사랑&amp;rsquo;은 작사가 한소아 씨의 실화에 김정길 씨가 곡을 쓴 것으로, 서울에서 남도를 오가며 이룬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 얘기를 담고 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amp;ldquo;늦게 이룬 꿈이니만큼 남들보다 좀 더 노력하고 열정적으로 노래하려고 해요. 그에 못지않게 봉사하는 마음도 다잡으려고 합니다. 저를 사랑해 주시고 아껴주신 팬들께 보답하는 길을 좋은 노래와 봉사 밖에 더 있겠어요?&amp;rdquo;&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다연 씨는 노래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봉사에 대한 열정도 뜨겁다. 그래서 봉사하는 일이라면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꼭 참석해야 직성이 풀린단다.&lt;br /&gt;&lt;/p&gt;...</description><category>문화/예술</category><author>관리자</author><pubDate>2014-01-16 00:34:33</pubDate></item><item><title>&quot;염전 일은 내 천직, 내 포부는 해남 소금의 전 세계 유통&quot;</title><link>http://haenam.com/bbs/?tbl=human&amp;mode=VIEW&amp;num=13&amp;category=비즈니스/경영</link><description>&lt;div&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5px 0px&quot; align=&quot;center&quot;&gt;&lt;img style=&quot;width: 550px; height: 368px&quot; id=&quot;image_004098056147023049&quot; class=&quot;chimg_photo&quot; border=&quot;0&quot; alt=&quot;&quot; src=&quot;/data/image/rBIuoXFHfIESZdnziTavO1qNTSuq.jpg&quot; /&gt;&lt;/p&gt;&lt;/div&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보름 넘게 우리를 괴롭혀 오던 열대야가 잠시 주춤한 날이었다. 그러나 계속 된 폭염은 그 기세를 꺾을 줄 몰랐다. 오히려 그 여세를 몰아 우리를 인내의 한계로 내몰고 있었다. 오후 4시, 만호염전은 햇볕을 먹고 사는 염전답게 한 여름 뙤약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염전 자재와 소금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를 빼면 허허벌판이었다. 다행히 염전 입구에는 인부들이 잠시 쉴 수 있게&amp;nbsp;행사용 텐트가 세워져 있었다. 텐트는 굴곡이 심한 땅에 세워서 그런지 누가 위에서 누르고 있는 듯 평균보다 낮고 넓적하게 펼쳐져 있었다. 가뜩이나 바람 한 점 없는 날, 낮은 텐트는 더위를 피하는데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 밑에 앉아있어 봐야 직사광선만 간신히 피할 수 있을 뿐 한낮의 열기와 더위까지는 어쩌지 못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모두가 햇볕을 피해 그늘을 찾는 오후 4시 경, 김성경 씨는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써레를 밀고 소금 결정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가 움직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하얀 소금 알갱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 작은 소금 산을 이루었다. 이렇게 모인 소금은 순백의 백색 그대로였다. 염전에서 일하는 그가 폭염을 피할 수 있는 도구는 오직 모자 하나뿐이었다. 누가 열심히 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닌데 김 씨는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지금 손을 놓아버리면 소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울라치면 결정이 좋은 소금은 포기해야 한다. 김 씨가 부지런히 움직인 만큼 좋은 소금이 생산되는 것이다.&lt;/p&gt;&lt;br /&gt;
&lt;div&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5px 0px&quot; align=&quot;center&quot;&gt;&lt;img style=&quot;width: 550px; height: 368px&quot; id=&quot;image_039642479428212557&quot; class=&quot;chimg_photo&quot; border=&quot;0&quot; alt=&quot;&quot; src=&quot;/data/image/zZHoLpkY.jpg&quot; /&gt;&lt;/p&gt;&lt;/div&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 씨가 염전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마을에 사는 후배 고 씨가 오토바이에 아들을 태우고 염전을 찾아왔다. 그리고 승용차 한 대가 그의 뒤를 따랐다. 수원에서 사는 관광객 부부가 해남을 여행 온 차에 성경 씨의 소금을 사기위해 일부러 들린 것이었다. 지난해까지는 김 씨가 길가에 포장 점포를 차려 두고 소금을 판매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김 씨가 길거리 점포를 운영하지 않자, 관광객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김 씨 염전에 찾아 온 것이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amp;ldquo;작년에도 여기서 소금을 사 갔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도 소금을 사려고 왔습니다.&amp;rdquo;관광객은 지난 해 구입한 소금이 정말 맘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김 씨는 야적장에 있는 소금을 차에 실어주고는 자신의 차에 있는 명함을 꺼내 관광객에게 건넸다.&lt;br /&gt;&amp;ldquo;여기 전화번호 있으니 전화로 주문하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amp;rdquo;관광객은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염전을 떠났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나는 타고난(?) 염전 일꾼&amp;ldquo;&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남들은 염전 일 한나절만 해도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더워서 그럴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 정도는 아니고, 힘들긴 해도 할 만합니다.&amp;rdquo;기자가 물었다.&amp;ldquo;체질적으로 타고 나서 그런 것 아닌가요?&amp;rdquo;&amp;ldquo;타고 난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저도 힘들지요. 그런데 남들이 체감하는 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적부터 염전 일을 해서 길이 들었나 봅니다.&amp;rdquo;&lt;br /&gt;그의 부친은 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지금의 염전을 인수했다. 그는 그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친의 염전 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시로 나가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23세 되던 해, 건강이 좋지 않은 부친의 부름을 받고 귀향해 현재까지 염전업과 농사일을 하고 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때 제일 속상해&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그는 부친과 함께 3정반(7,000여 평)의 염전을 꾸려 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고만고만한 염전 10개가 모여 만호염전이란 법인도 설립했다. 김 씨는 이렇게 모여 있는 10개 염전 주인 모두가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amp;ldquo;제가 아는 이분들은 모두 정직하게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언론에서 소금과 관련된 나쁜 보도가 나올 때, 그리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전화해서 걱정해 줄 때 정말 속상합니다. 극히 일부 염전이나 포대갈이 하는 업자로 인해 전체가 오해를 받는 것이니까요......, 우체국에서 상품을 판매하시는 분이 그러는데 다른 상품은 쉽게 판매가 가능한데 소금 한 포대를 팔기위해 10분 동안을 상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습니다. 소금이 우리 생활에 필수품인 만큼 불신도 그만큼 크다는 얘기 같습니다.&amp;rdquo;&lt;br /&gt;그는 자신이 정직하게 소금을 생산한 만큼 소비자들도 자신을 좀 더 믿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큰 것 같았다. 그는 염전에서 함초를 수확해 일 년에 200만 원 정도의 과외수입도 얻고 있다고 말했다.&amp;nbsp;&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염전 이야기&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 씨는 이어 염전 얘기를 들려주었다. 염전 일은 보통 2월 중순부터 시작한다. 소금을 생산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먼저 염전을 보수한다. 패이거나 깎인 둑을 정비하고 염전 주변을 말끔하게 청소한다. 그런 다음 3월 초부터 소금 생산을 시작해 그해 10월 말께 소금 생산을 종료한다. 해남의 바닷물 염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낮은 0도인데, 염도를 21~22도까지 끌어올려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다른 지역은 기본 염도가 11도나 되는 곳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소금이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4월 말부터 9월 초까지는 양질의 소금이 생산된다. 그러나 3월 초와 10월 말에 생산되는 소금은 너무 짜 일반인들을&amp;nbsp; 대상으로 판매를 하지 않고 염전을 찾아오는 상인들에게 공업용으로 판매하고 있다. 소금은 염전의 토질에 따라 맛이 다른데 토질이 좋은 곳은 맛 좋은 소금이 생산되고 토질이 나쁜 곳은 애초부터 좋은 소금 생산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가격만 가지고 소금 구매를 판단하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농사 이야기&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 씨는 염전 일과 병행해 2만여 평의 논에 벼농사를 짓고 있다. 누가 봐도 대농이다. 그런데 김 씨는 자신은 대농이 아니라고 말했다. 김 씨가 사는 황산면 신정마을에는 김 씨보다 농사를 더 많이 짓는 사람이 있어 자신은 상대적으로 대농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가 염전 일을 하면서도 이렇게 농사를 많이 지을 수 있는 이유는 새벽 4시부터 밤늦게까지 논에 나가 일하시는 부지런한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운 좋게 염전 일과 농사가 겹치지 않기 때문이란다. 모내기 할 때는 염전 일과 잠시 겹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염전 일이 한가할 때 벼농사를 지을 수 있어, 염전 일과 논농사를 병행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단다. 그는 염전 일과 가을걷이가 끝나면 절임배추 판매를 준비한다. 틈틈이 그 해 판매할 수 있는 양만큼의 배추를 밭에 미리 심어놓고, 김장철이 돌아오면 자신이 생산한 배추와 소금을 이용해 절임배추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그리고 절임배추 판매가 끝나면 그는 공식적인(?) 휴가에 들어간다. &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lt;br /&gt;
&lt;div&gt;&lt;img border=&quot;0&quot; alt=&quot;&quot; align=&quot;left&quot; src=&quot;/data/image/mEnAvzDHiCdsJ9.jpg&quot; width=&quot;200&quot; height=&quot;299&quot; /&gt;&lt;/div&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해남소금 유통은 나의 포부&lt;br /&gt;&lt;/p&gt;&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그는 염업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 중 자신이 제일 어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좀 더 진취적인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해남소금의 전 세계 유통이다. 입소문으로는 해남소금의 우수성이 입증되고 있는데 비해 그 경제적 위상과 가치는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그래서 그는 해남소금의 직거래 유통망을 갖추고 싶다고 했다. 현재 업자들에게 헐값에 판매되고 있는 해남소금의 직거래를 유도해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가 이런 신념을 갖게 된 데는 그가 소금 생산자로 소금의 특징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 씨는 &amp;ldquo;소금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다른 상품과는 달리 가격이 더 안정적이고, 변질되거나 상할 우려가 없으며,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더 값이 나가는 장점을 지닌 상품이기 때문에 유통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amp;rdquo;이라고 말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사랑하는 가족과 지역에 대한 봉사&lt;/strong&gt;&lt;br /&gt;그는 지인의 소개로 아내를 만났다. 그리고 첫눈에 반해 결혼을 했다. 현재는 아내와의 사이에 초등학생 아들과 딸을 두고 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특별하게 좋은 순간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항상 아내와 아이들이 좋기 때문이란다. 가족을 설명하는 그의 표정에는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가족만 생각해도 그저 행복한 사람 그런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정말 순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축복받은 삶을 세상 사람과 나누려 한다고 했다. 그는 현재 지역의 봉사단체 몇 곳에 가입해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와 함께 &amp;lsquo;뿌리나눔&amp;rsquo;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황영선 씨는 &amp;ldquo;회비만 내고 봉사활동에 참석하지 않는 회원도 있는데 김성경 후배는 한 번도 봉사활동에 빠진 것을 본적이 없다&amp;rdquo;며 &amp;ldquo;그의 성실함과 진정성에 감탄했다&amp;rdquo;고 말했다. &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amp;lt;전라닷컴 윤승현&amp;gt;&lt;/p&gt;...</description><category>비즈니스/경영</category><author>해남넷</author><pubDate>2012-08-25 12:37:49</pubDate></item><item><title>“금융사고 예방은 당연히 해야 할 일”</title><link>http://haenam.com/bbs/?tbl=human&amp;mode=VIEW&amp;num=12&amp;category=비즈니스/경영</link><description>&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해남군산림조합은 박준범&amp;nbsp;상무의 발 빠른 대처로&amp;nbsp;고객의 대출금 3억 3500만 원이 금융범죄자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번 금융사기를 모의한 사기범들은 동종전과가 있는 범죄자로 이미 인근지역에서 1차 피해를 입힌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에는 모 금융기관의 안이한 대처로 피해를 막을 수 없었으나 이번에는 박준범 상무가 적극적으로 대처로 거액의 금융사기사건을 초기에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박 상무는 금융피해를 막은 모범사례로 꼽혀 각계각층의 격려가 쏟아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amp;ldquo;산림조합 직원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했을 것&amp;rdquo;이라며 겸손해 했다.&lt;/strong&gt;&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피해자의 무지와 방심이 금융사기 피해를 불러&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해남군산림조합에 대출을 신청한 김 모 씨는 A씨에게 산림조합 통장의 인터넷뱅킹 인증서과 보안카드(OPT)들 넘겨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김 씨는 인터넷뱅킹 인증서와 보안카드를 가지고 있으면 A씨가 어느 곳에든지 돈을 인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 씨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는 사이, 그의 대리인은 해남군산림조합에서 정상적으로 대출을 받았다. 대출승인이 떨어지고 김 씨의 계좌로 대출금이 입금 완료되었다. 그런데 5분이 채 되지 않아 3억 3600만원의 대출금 중 3억 3500만 원이 김 씨의 산림조합 통장에서 빠져나가 대구은행 계좌를 거쳐 다시 제3자 명의의 우리은행계좌로 이체되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본인들은 이런 사실을 까많게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의심한 대구은행 사기담당자가 우리은행과 해남산림조합에 전화를 걸어 &amp;ldquo;금융사기로 추정 된다&amp;rdquo;는 연락을 해왔고 이런 사실을 전달받은 우리은행은 일단 B모 씨의 계좌를 지급정지 시켰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박 상무의 활약&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해남군산림조합 박준범 상무의 발 빠른 대처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금융사기사건이라 판단한 박 상무는 우선 우리은행에 전화해 이동 된 자금의 잔존여부를 확인했다. 불행중 다행으로 3억 3500만 원이란 돈이 그대로 우리은행에 지급 정지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박 상무는 우리은행 관계자에게 읍소해 범죄혐의자에게 법적조치를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를 얻어냈다. 다행히도 우리은행 측에서 일정부분은 협조해 주었다.&lt;br /&gt;&amp;nbsp;&lt;br /&gt;박 상무는 먼저 예금ㆍ인터넷뱅킹 등 대출관련 서류를 챙겼다 그리고 해남경찰서를 향해 뛰었다. 마침 그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다. 담당 직원 대부분이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마침 자리를 지키고 있던 타 부서 직원을 만나 급한 상황을 호소했다. 연락을 받은 지능범죄수사팀이 속속 도착했다. 이때부터 우리은행계좌에 지급 정지돼 있는 피해금액을 돌려받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그때였다. 경기도에 거주하는 피해자 김 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112에 신고하고 피해조사를 받으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박 상무는 피해자에게 &amp;ldquo;경찰서에 출두하지 말 것&amp;rdquo;을 요청했다. 박 상무는 피해자 김 씨에게 오늘 중으로 법적조치를 마무리 하지 않으면 현재 지급정지 돼 있는 자금이 풀려 사기범죄자의 손에 넘어갈 수 있는데 경기도에 있는 피해자가 오늘 중으로 법적조치를 취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박 상무는 또 이곳에서 사건을 처리해야 오늘 중으로 처리할 수 있으니 자신에게 맡겨두라고 요청했다. 피해자 김 씨는 박 상무의 의견을 따랐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경찰서에서 필요한 서류를 꾸미는 동안 시간은 오후 6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박 상무의 귀에는 시계바늘 가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마음이 급하니 지금하고 있는 작업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6시를 몇 분 남겨두고 마침내 모든 서류가 완비됐다.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지만 환호와 안도의 순간이었다. 박 상무를 비롯한 직원 모두가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이튿날 박 상무는 통장을 압류하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거액의 현금을 압류하기 위해서는 1억 원이 넘는 공탁금과 또 변호사 성공사례금을 줘야 했다. 그런데 다행이도 좋은 변호사를 만나 변호사 기본 수임료를 가지고 법적인 조치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박 상무는 그 일로 신세진 권세진 변호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amp;nbsp;&amp;nbsp; &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lt;strong&gt;상반된 평가, 산림조합 갈 길이 멀다&lt;/strong&gt;&lt;br /&gt;해남경찰서의 모 형사는 &amp;ldquo;이번 사건은 관내에서 벌어진 거액의 금융사기 피해를 막은 모범사례&amp;rdquo;라며 &amp;ldquo;박 상무에게 표창을 줘야한다고 말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산림조합중앙회에서도 박 상무에게 전화를 걸어 박 상무의 발 빠른 대처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전 산림조합 감사였단 85세의 전 모 씨도 박 상무에게 전화를 걸어 &amp;ldquo;정말 좋은 일했다&amp;rdquo;며 자신의 일처럼 고마워했다.&lt;br /&gt;&amp;nbsp;&lt;br /&gt;그러나 일부 임원들의 눈에는 이런 박 상무의 행동이 탐탁지 않게 보였던 것 같다. &amp;ldquo;우리 산림조합이 책임질 일도 아닌데 상무란 사람이 저렇게 채신머리없이 행동 한다&amp;rdquo;는 비난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쯤은 못 들은 척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모 이사는 &amp;ldquo;내부 공모가 의심되므로 조합장과 박 상무의 퇴직금을 가압류해야 한다&amp;rdquo;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그 말을 들은 박 상무는 모멸감으로 치를 떨어야 했다. 그런데 이 일은 이 모 이사의 주장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박 상무는 퇴직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산림조합 이사를 앞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수모를 다시 겪어야 했다. &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lt;strong&gt;금융은 한시라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직업&lt;/strong&gt;&lt;br /&gt;박 상무를 말했다.&lt;br /&gt;&amp;ldquo;금융은 관리자를 비롯해 직원들이 잠깐만 방심해도 사고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겁니다. 예전에 금융감독위원회에서 감사를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 날 바로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시겠지요?&amp;rdquo;&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박 상무는 잠시 웃음을 보였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amp;ldquo;조사하러 나온 분이 평소에 어떻게 관리하느냐고 묻기에 내가 하던 대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당일의 거래를 당일에 확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다음 날 출근과 동시에 모든 입출금 내역을 확인해 처리하고 있다. 그랬더니 더 이상 조사할 필요가 없다며 바로 돌아갔습니다.&amp;rdquo;&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기자가 물었다.&lt;br /&gt;&amp;ldquo;직원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얘기가 돌던데......&amp;rdquo;&lt;br /&gt;박 상무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amp;ldquo;금융기관도 각각 수준이 다릅니다. 직원들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하는데 공개 채용된 직원이 있는 반면에 인맥으로 들어온 직원도 있어 실력의 편차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amp;nbsp; 이런 직원들을 교육시키는 것도 관리자의 의무입니다. 금융사고 터져 산림조합이 고객의 신뢰를 잃고 비난 받는 것보다는 좀 엄하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amp;rdquo;&amp;nbsp;&amp;nbsp; &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고객에 대한 불친절만큼은 용서할 수 없어&lt;/strong&gt;&lt;br /&gt;박 상무는 말을 이어갔다.&lt;br /&gt;&amp;ldquo;나와 우리 직원들은 고객들께서 산림조합을 이용해 준 고객들의 덕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고객들이 우리산림조합을 이용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급여는 누가 줍니까? 그래서 우리 직원 중에 누구라도 고객께 함부로 하는 것을 보면 고객이 보는 자리에게 직원을 질책을 합니다. 제3자가 보면 직원에 대한 인격적 모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앞으로도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과 같이 할 것입니다.&amp;rdquo;&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산림조합의 개혁과 발전은 남은 자의 몫&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박준범 상무는 7월 26일 오후 5시 산림조합 2층에서 정년퇴임식을 가질 예정이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농협과 산림조합을 넘나들며 조합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34년의 직장생활을 정리하는 것이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그는 고흥출신이다. 그렇지만 해남이 좋아 해남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텃밭이 작은 땅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란다. &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해남 사람 모두는 아닐지라도 해남군산림조합에서 그를 상대했던&amp;nbsp;누군가는 그를 그리워하게 될지 모른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amp;lt;전라닷컴 윤승현&amp;gt;&lt;/p&gt;...</description><category>비즈니스/경영</category><author>관리자</author><pubDate>2012-07-24 17:00:10</pubDate></item><item><title>영원한 방송대인 정승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해남학습관장</title><link>http://haenam.com/bbs/?tbl=human&amp;mode=VIEW&amp;num=11&amp;category=비즈니스/경영</link><description>&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정승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해남학습관 관장. 방송대에 대한 그의 애정과 자부심은 남다르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느 좌석에 있던 방송대에 대한 고마움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방송대에 대한 그의 애정과 자부심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그는 정년퇴임을 2년 앞두고 해남학습관에 부임했다. 순환보직 때문에 광주와 제주도를 거쳐 해남학습관으로 부임한 것이다.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정년퇴임을 앞두고 고향으로 임지를 옮기는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정 관장이 고향인 해남학습관의 관장으로 부임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해남학습관의 역사에 있어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방송대의 선배로 해남학습관의 개관을 지켜보았고 어쩌면 해남학습관의 폐관을 지켜봐야 할 수도 때문이다. &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그는 해남군 문내면 출신이다. 그가 청소년기를 보낸 1970~80년대의 문내면은 당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동네였다. 하루하루 근근이 연명하던 집이 태반이었다. 이런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은 대단한 호사였다. 정 관장의 동네 친구 7명 중 2명 만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 당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다행히 정 관장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사실 정 관장의 가정형편도 그리 좋지 않아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부보님의 배려로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진학은 사정이 달랐다. 도저히 대학입학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정 관장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대학진학이 힘들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대학진학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었다. 사정이 어려울수록 학업에 대한 열망은 농도를 더해 갔다. 그때였다. 지인으로부터 방송대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가난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해야 했던&amp;nbsp; 정 관장에게는 어둠속을 환하게 비추는 한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정 관장은 이듬해 방송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정 관장은 1989년 방송대 전산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1991년 광주대 문헌정보학과를 편입했다. 그 후 방송대 광주지역대학 도서관 사서로 근무했다. 방송대가 정 관장 평생의 직장이 된 것이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해남학습관의 개관&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당시 방송대는 서울대 부설학교였다. 2년제 과정으로 각 시군 공공도서관에서 학생들을 관리하며 방송대 교재를 대여해 주었다. 방송대 학생만 따로 이용할 수 있는 학습관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1984년 5월, 마침내 해남학습관이 개관했다. 당시 광주학습관 관장이었던 황산면 출신 임용주 관장이 당시 방송대 본교 권순찬 학장에게 건의해 군 최초의 해남학습관이 개관한 것이다. &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amp;ldquo;당시에는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지속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개관했는데, 요즘 대세인 사이버 교육과도 잘 맞아 떨어집니다. 임 관장님과 권 학장님은 30년 이상의 미래를 내다보신 겁니다.&amp;rdquo;&amp;nbsp; &lt;br /&gt;정 관장의 말이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정 관장은 방송대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다.&lt;br /&gt;&amp;ldquo;방송대가 고위공무원 출신학교 5위에 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이 결과만 가지고도 방송대가 우리나라 고등교육에 얼마나 일조했는지 증명이 될 것입니다. 얼마 전 국장으로 진급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내게 고맙다는 인사였습니다. 내가 별로 잘 해준 것도 없는데 무엇이 고마웠을까요? 제가 그 친구에게 방송대를 권유했는데, 그 친구는 방송대를 졸업해 국장까지 진급할 수 있었던 겁니다.&amp;rdquo;&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방송대는 명품학교&lt;/strong&gt;&lt;br /&gt;&amp;ldquo;본교에 입학하거나 편입한 학생들의 직업과 연령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보탠다면 학력도 다양합니다. 옛날처럼 가난한 사람만 입학하는 학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부족한 공부를 위해 편입한 학생도 있고 진로를 바꾸기 위해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 입학한 학생도 있습니다. 지역 전문대학들이 채워줄 수 없는 지식을 방송대가 채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학교를 지역에서 잃는다는 것은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amp;rdquo;&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정 관장은 부인 명숙경 씨와의 사이에 외아들 진석 씨를 두고 있다. 그런데 몇 달 전 아들 진석 씨를 출가시켰다. 집에는 두 부부만 남았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런데&amp;nbsp; 그것도 여의치 않다. 정 관장의 집은 광주고 근무지는&amp;nbsp; 해남으로 요즘 트렌드(?)인 주말&amp;nbsp; 부부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정 관장은 부인 명숙경 씨를 만났을 때의 일화를 털어놓는다. 정 관장은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은 정 관장이 부모님이 주선한 처자와 선보기를 원했다. 내키기 않았지만 부모님의 명이라 선을 보기로 했단다. 그 때 명숙 씨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amp;ldquo;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것 같습디다&amp;rdquo;는 것이 정 관장의 설명이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영원한 방송대인 정승범 관장. 그의&amp;nbsp; 앞길에는 정년퇴임이란 피할 수 없는 결정과 해남학습관의 존치라는 무거운 과제가 남아있다. 그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사회가 문제의식을 갖는다면 그가 진 짐은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lt;br /&gt;&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amp;lt;전라닷컴 윤승현&amp;gt;&lt;/p&gt;...</description><category>비즈니스/경영</category><author>관리자</author><pubDate>2012-07-24 13:37:53</pubDate></item><item><title>노량진 수산시장은 김홍철의 피와 땀</title><link>http://haenam.com/bbs/?tbl=human&amp;mode=VIEW&amp;num=6&amp;category=비즈니스/경영</link><description>&lt;div&gt;&lt;img border=&quot;0&quot; alt=&quot;&quot; align=&quot;left&quot; src=&quot;/data/image/ZbVk6ikMC9Y.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327&quot; /&gt;&lt;/div&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홍철 전 수산업협동조합 중앙회 경제사업 대표이사는 자신의 30년 수협 인생 중 가장 자랑스러웠던 일을 꼽으라고 하면 그것은 &amp;lsquo;노량진 수산시장&amp;rsquo;을 인수한 일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사실 그가 수협중앙회에서 근무하면서 이뤄낸 성과는 이것 말고도 많다. 일몰제(법률이나 각종 규제의 효력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없어지도록 하는 제도)에 해당돼 존폐의 기로에 서있던 면세유류 공급기간을 4년 연장한 일이라든지, 정부와 담판을 벌여 경제사업부 예산 1,200억 원을 확보한 일, 유류저장 시설을 확보한 일, 178억에 달하는 외환사고를 수습한 일, 해태건조기에 대해 면세유를 공급받을 수 있게 한 일, 그리고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amp;lsquo;부실금융 회수작전&amp;rsquo;, 속칭 &amp;lsquo;엔테베 작전&amp;rsquo;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도 김홍철은 노량진 수산시장에 대해 유난이 애착이 많다. 그가 노량진 수산시장에 대한 애착을 쉽게 끊어 내지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노량진 수산시장은 그와 동료들이 온 몸을 불살라 일궈낸 수협인 모두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 터전은 김홍철에 의해 확실하게 자리매김 했다. 그런데 노량진 수산시장이 동양의 메카로 도약하려는 순간 김홍철은 정치적인 이유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렇듯 노량진 수산시장은 김홍철의 삶에 하나의 신화를 추가했고 또 아쉬움과 미련도 남겼다. &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2001년 노량진 수산시장의 인수를 둘러싸고 정치권의 공방이 가열됐다. 누가 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하느냐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2001년 9월 11일 자 한겨레신문 &amp;ldquo;야, 응찰포기 겨냥 수협국감 앞당겨&amp;rdquo;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면 &amp;ldquo;한나라당이 수협의 입찰 포기를 종용하기 위해 고의로 국정감사 일정을 앞당겼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amp;rdquo;라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그 당시 노량진 수산시장의 인수 경쟁에 뛰어든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방증해주고 있는 기사이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당시, 정치권의 눈치를 보던 대표이사와 일부 이사들은 노량진 수산시장의 인수를 반대했다. 조합원의 80~90%가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김홍철의 생각은 달랐다. 수협인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협중앙회가 노량진 수산시상을 인수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노량진 수산시장 입찰에 참여하는 것은 당시 권력의 실세와 입찰 경쟁을 벌여야 했기 때문에 일이 잘못되면 김홍철의 신변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러나 김홍철은 뚝심으로 밀어 붙였다. 김홍철은 &amp;ldquo;어업인의 시장 지배력을 가지려면 반드시 노량진 수산시장은 수협중앙회가 인수해야 한다.&amp;rdquo;라는 당위성을 내세워 의원들을 설득해 나갔다. 김홍철의 설득이 통했는지 서울의 노른자위 땅 13,500평을 1,480여억 원에 인수하게 된다. 수협중앙회는 이때 정부로부터 수산시장 현대화 시설자금 1,800억의 70% 1500억 원을 지원 받는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수협중앙회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했지만 상인들의 반발이 시작됐다. 자신들이 길거리로 나앉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들은 500여 명씩 때지어 다니며 수협중앙회 직원들을 위협했다. 한마디로 험악한 분위기였다. 그들에게는 생존권이 달린 문제라 물러설 수 없었던 것이었다. 수협측은 그들에게 불이익이 없을 것이라 약속했지만 상인들은 과거에 경험했던 불신 탓에 수협의 약속을 믿어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김홍철이 나섰다. 김홍철은 상인들을 직접 만나 &amp;ldquo;상인이 없는 시장은 시장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다. 각 상인마다 분사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 상인과 수협이 공존하는 시장으로 만들겠다.&amp;rdquo;며 이들을 설득했다. 30년 김홍철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김홍철은 10분 만에 이들을 설득해 돌려보낼 수 있었다. &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홍철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lt;br /&gt;&amp;ldquo;그 당시 내 말을 곧 법이었어. 그렇다고 강제적으로 압박을 한 것이 아니고......, 내가 수협에 몸담고 있는 동안 내가 뱉은 말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는 것을 상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말을 믿어줬던 거야.&amp;rdquo; &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이때부터 노량진 수산시장에 대한 김홍철의 개혁 드라이브가 시작됐다. 김홍철은 먼저 시장 내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척결했다. 신뢰받는 시장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그리고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시장 내의 전등 3,800여개를 교체했다. 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 냄새제거시설도 갖추었다. 여성 고객들이 하이힐을 신고 수산시장을 마음 놓고 드나들 수 있도록 바닥을 청결하고 유지했다. 이런 일련의 작업들은 노량진 수산시장이 혐오시설이라는 오명을 벗고 사랑받는 시설로 거듭나기 위해 시급히 개선해야 할 과제였다. 또한 상인들이 매장의 위치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장소추첨제를 도입했다. 특별한 백이 없어도 추첨에서 뽑힌 상인들은 좋은 위치의 매장을 운영할 수 있었다. 이것뿐만 아니었다. 일부 상인들이 좋은 장소의 매장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2년 마다 장소를 교체하는 하는 제도도 마련했다. 그리고 매년 1~2회 이벤트를 개최해 상인들과 고객들이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김홍철의 이런 노력은 그해 바로 결실을 맺었다. 그동안 적자로 운영되던 노량진 수산시장이 인수 첫해부터 30~40억의 흑자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기록을 매년 경신했다. 현재의 노량진 수산시장의 명성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수협중앙회 경제사업부 예산 1,200억을 확보하다&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홍철이 수협중앙회 대표이사로 취임할 당시, 수협은 IMF로 인해 부도위기에 몰려있었다. 수협 신용사업부에 공적자금이 투입되고 있었고, 수협 경제사업부의 예산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용사업부에 공적자금이 투입됐기 때문에 경제사업부는 신용사업부의 자금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이때 김홍철은 경제사업부의 예산 확보를 위해 관련 부처들을 찾아다니며 예산지원에 대한 당위성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김홍철은 관련부처 담당자에서부터, 예산부처 담당자, 그리고 국회의원까지 필요하다면 누구라도 가리지고 않고 찾아다녔다. 이런 김홍철의 진정성이 통했는데 2003년 1,200억 원의 예산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정부가 2003년부터 5년 동안 매년 200억씩을 수협중앙회에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시불로 주지 못한 금액에 대한 이자까지 합산해 지원해 주기로 한 것이다. 정부의 예산을 확보함으로써 수협은 외부 차입을 하지 않고도 자본금을 충당했다. 이로 인해 수협은 매년 100억여 원의 경영개선효과를 가지게 된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나는 이렇게 설득했다&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홍철이 공무원과 정치인을 설득하기 위해 펼친 논리는 다음과 같다.&lt;br /&gt;&amp;ldquo;수협의 문제는 경제적인 논리보다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풀어가야 한다. 수산업을 버리면 우리나라 바다는 일본, 중국의 어장이 될 것이다. 우리 수산업이 존재해야 국토를 지킬 수 있다. 이 문제는 통치권적인 차원에서 결정해야 할 사안이다&amp;ldquo;&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담당 공무원이 난색을 표하면 김홍철은 &amp;ldquo;담당은 이 문제를 위로만 올려주기만 하면 된다. 상관은 내가 설득하겠다.&amp;rdquo;라며 담당자를 설득했다. 당시 김홍철에게 실무자를 거치지 않고 윗선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인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홍철은 &amp;ldquo;편법을 쓰지 않고 정상적이 절차를 밟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amp;rdquo;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김홍철은 몇 번의 사업 추진 과정에서 이러한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lt;br /&gt;&lt;br /&gt;&amp;ldquo;사업 하나를 성사시키려면 정부부처의 주사, 사무관, 과장, 국장을 차례로 설득해야 하는데, 실무자 만나기는 쉽나? 전국에서 하루에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실무자를 만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데 나만 만나주겠어. 그러니 실무자가 출근할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그의 주변을 서성거리는 것이 일이지. 화장실까지 따라가서 말 한마디만 나눠도 절반은 성공이야. 어렵사리 실무부서를 통과해도 다음은 예산담당부서를 찾아가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해. 예산부서를 통과하면 국회의원을 찾아가 설득해야 하고......, 이렇게 1년은 꼬박 투자해야 정부예산을 타낼 수 있지.&amp;rdquo; &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길 잃은 행정에 해법을 제시하다&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홍철 전 수산업협동조합 중앙회 경제사업 대표이사의 경험담은 목적과 명분에서 길을 잃고 허우적대는 자치단체의 행정에 확실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사업의 목적이 확실해야 하고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돼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같은 요건들이 갖춰지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김홍철은 이런 내용을 &amp;ldquo;&amp;lsquo;신뢰성&amp;rsquo;, &amp;lsquo;투명성&amp;rsquo;, &amp;lsquo;공정성&amp;rsquo;을 갖추면 못 이룰 일이 없다&amp;rdquo;라는 말로 함축해 표현하고 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김홍철의 못 다 이룬 꿈&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1,480여억 원에 인수한 노량진 수산시장은 현재 1조 원대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김홍철의 선택과 집요한 노력이 이 같은 신화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김홍철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노량진 수산시장을 획기적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그것은 노량진 수산시장 13,500평 전체를 아시아의 수산물 메카로 조성하는 일이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층은 수산물 도매시장, 2층은 수산물 가공시설, 3층은 먹거리(음식점)촌, 4층은 문화관으로 설계되어 있다. &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홍철은 자신의 임기 중에 설계를 마치고 예산까지 확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대표이사직을 물러나고 몇 년이 지났지만 사업이 시행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김홍철은 지금 &amp;ldquo;동력을 잃은 노량진 수산시장이 하루빨리 아시아의 수산물 메카로 거듭나는 것을 보고 싶다&amp;rdquo;는 염원을 얘기하고 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amp;lt;주간 전라닷컴 윤승현&amp;gt;&lt;/p&gt;...</description><category>비즈니스/경영</category><author>관리자</author><pubDate>2011-07-23 12:27:25</pubDate></item><item><title>장흥-제주 간 ‘오렌지호’를 아시나요?</title><link>http://haenam.com/bbs/?tbl=human&amp;mode=VIEW&amp;num=5&amp;category=비즈니스/경영</link><description>&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어민들의 극심한 반대를 설득하다&lt;/strong&gt;&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lt;/strong&gt;&amp;nbsp;&lt;/p&gt;&lt;br /&gt;
&lt;div&gt;&lt;br /&gt;
&lt;div&gt;&lt;img border=&quot;0&quot; alt=&quot;&quot; align=&quot;left&quot; src=&quot;/data/image/3xF24aybDt18pWBOIwXhTS7viA1kXv.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427&quot; /&gt;&lt;/div&gt;&lt;/div&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홍철은 오렌지호의 정식 취항을 3일 앞둔 상황에서 담당 직원으로부터 다급한 도움 요청을 받았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민원을 해결할 수 없으니 김홍철 부회장님께서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담당 직원들의 힘으로는 거세게 항의하는 민원인들을 설득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직원들의 요청을 받은 김홍철은 한달음에 완도로 내려갔다. 정식 취항이 3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민원으로 인해 항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약속한 날짜에 &amp;lsquo;오렌지호&amp;rsquo;를 취항시킬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여태까지는 순조로웠는데 준비단계 막바지에서 뜻밖의 복병을 만난 것이다. 배가 제 날짜에 운항을 개시하려며 항로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항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오렌지호가 다녀야 할 뱃길은 신설항로였다. 그런데 오렌지호가 다녀야할 수로, 회진에서 청산도 까지는 어장이 많았다. 이 때문에 양식장 피해를 우려한 완도주민들이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오전 10시, 서로의 이해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불꽃 튀는 마라톤회의가 시작됐다. 이날 회의에는 선박회사를 대표해 김홍철이 나섰고, 관계 공무원 그리고 지역주민과 대책위원들 합쳐 150여 명이 참석했다. 당초 십 수 명만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됐던 지역주민들이 150여 명 참석한 것이었다. &amp;lsquo;오렌지호&amp;rsquo; 취항에 따른 지역주민들의 우려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었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주민들이 오렌지호의 취항을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amp;ldquo;오렌지호가 어장을 지나게 되면 너울성파도가 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어장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amp;rdquo;는 것과 &amp;ldquo;파도로 인해 어장 도구를 실은 바지선이 전복 될 수도 있다&amp;rdquo;는 염려 때문이었다. &lt;br /&gt;김홍철은 주민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amp;ldquo;오렌지호가 취항을 하게 되면 너울성파도로 인해 해초류가 피해를 본다고 주장하는데, 해초류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적당한 너울성파도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너울성파도로 인해 어장에 피해가 발생할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김 양식에 대한 피해도 우려하는데, 김 양식 기간 동안에는 오렌지호의 최대 속도 38노트에서 감속해 12~14노트로 서행을 하겠다. 만약 오렌지호의 운항으로 인해 어민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고되면 어민 대표자, 관, 학계, 정부 관계자, 회사가 참여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피해사례를 조사 하겠다. 조사 후 &amp;lsquo;오렌지호&amp;rsquo;에 의한 피해로 판명 될 경우 어민 피해에 대해 충분히 보상하겠다.&amp;rdquo;&lt;br /&gt;김홍철은 이와 같이 내용으로 주민들을 설득했지만 주민들의 반응은 반신반의 하거나 냉담했다.&lt;br /&gt;&amp;ldquo;당신과 회사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 수 있느냐?&amp;rdquo;는 불신이었다.&lt;br /&gt;이 같은 주민들의 불신에 대해 김홍철은 어민들을 위해 일해 온 30년 수협인의 인생을 걸고 설득했다.&lt;br /&gt;&amp;ldquo;내가 수협 인들을 위해 30년 동안 해 온 일에 대해서는 여기에 계신 수협 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쌓은 30년의 명성을 &amp;lsquo;오렌지호&amp;rsquo;에 관한 약속 때문에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러니 영원한 수협인 김홍철을 믿어달라.&amp;rdquo;는 읍소였다.&lt;br /&gt;이 같은 김홍철의 설득이 통했는지 오전 10시에 시작해 오후 10시가 돼서야 끝난 마라톤 회의에서 극적인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완도지역 주민들과의 합의를 이룬 다음 날, &amp;lsquo;오렌지호&amp;rsquo;는 정식 운항허가를 취득했다. 김홍철의 지식과 뚝심, 그리고 어민들을 위한 진정성이 &amp;lsquo;오렌지호&amp;rsquo;를 약속한 날짜에 운항할 수 있게 한 것이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관광산업은 지역경제 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 경제에도 영향을 미쳐&lt;/strong&gt;&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홍철의 관광이 미치는 경제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lt;br /&gt;&amp;ldquo;지역을 발전시키려면 지역에 사람이 많이 모여야 하고, 구매력을 가진 사람이 늘어야 지역경제가 활성화 된다. 365일을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대부분의 생필품을 자급자족을 하지만 외지에서 관광객들이 온다면 지역의 상품을 어떤 식으로든 소비를 할 수 밖에 없다. 당장 &amp;lsquo;오렌지호&amp;rsquo;에서 파생된 경제적인 효과만 들여다보자. 서울이나 대전에서 제주도를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간다. 이렇게 되면 전라남도 지역을 거쳐 가지 않기 때문에 우리 지역에서는 어떤 소비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이들이 제주도를 가기 위해 &amp;lsquo;오렌지호&amp;rsquo;를 탄다고 가정하면 인근 에서 숙박을 하거나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지역의 숙박업소와 음식점의 매출이 늘어나고 일자리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amp;rdquo;&lt;br /&gt;김홍철은 다음과 같은 추정치도 제시한다.&lt;br /&gt;&amp;ldquo;365명이 우리지역에서 하루를 머문다면, 지역 주민 1명이 지역에 거주하는 것과 동일한 경제효과를 낸다. 그런데 &amp;lsquo;오렌지호&amp;rsquo;를 이용하는 승객은 6개월에 30~50만 정도이다. 이들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효과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amp;rdquo;&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amp;lsquo;오렌지호&amp;rsquo;는 어떻게 탄생했나?&lt;/strong&gt;&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홍철이 부회장으로 있는 대아그룹은 해운 관련 전문회사이다. 이미 거제, 통영, 남해, 부산에서 여객선을 운항하고 있다. 또한, 대아그룹은 한국과 중국의 공식 해상 항로가 열리기 한 달 전 이미 중국에 배를 보낸 회사이다.&lt;br /&gt;대아그룹은 이미 포화상태에 있는 남해안을 벗어나 제주를 최단 시간에 갈 수 있는 지역을 물색 중이었다. 이때 김홍철은 자신의 고향인 전라남도에 사업을 추진할 수 있기를 건의했다. 회사는 김홍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역을 물색하던 중 고흥이 최적지로 떠올랐다.&lt;br /&gt;고흥은 이미 고흥-제주 간 화물선이 운항 중이었고, 항구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연유에서인지 선석허가를 내주지 않았다.&lt;br /&gt;이때 장흥군에서 이 사실을 알고 대야해운에 제안을 해왔다. &lt;br /&gt;&amp;ldquo;현재는 여객선이 운항할 수 있는 인프라가 없지만 3개월 내에 &amp;lsquo;오렌지호&amp;rsquo;를 띄울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 하겠다&amp;rdquo;는 약속이었다. 대아해운은 이 같은 약속을 믿고 장흥군과 MOU를 체결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3개월 만에 인프라를 구축한 장흥군&lt;/strong&gt;&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장흥군의 준비작업은 실로 놀라웠다.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약속한 3개월 만에 배를 띄우기 기반시설을 갖췄다.&lt;br /&gt;그 당시 이 상황을 지켜본 김홍철은 &amp;ldquo;지방행정관청이 이렇게 빨리 일을 해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amp;rdquo;라고 그 당시의 소회를 말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오렌지호가 흑자를 내는 것은 대아그룹만의 독특한 마케팅 때문&lt;/strong&gt;&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기자가 &amp;ldquo;오렌지호는 타사보다 저렴하게 운임을 책정했는데도 이익이 남느냐&amp;rdquo;고 묻자, 김홍철은 &amp;ldquo;흑자를 내고 있다&amp;rdquo;고 명쾌하게 답했다. 또, &amp;ldquo;오렌지호가 저렴한 운임에도 불구하고 흑자를 내는 것은 자사만의 독특한 경영기법과 마케팅 때문이다&amp;rdquo;라고 귀띔해 준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지역주민과의 상생은 기업의 이익과 부합&lt;/strong&gt;&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김홍철은 &amp;ldquo;지역 주민과의 상생은 기업의 이익과 직결 된다&amp;rdquo;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즉, 지역 주민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기업도 같이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대아해운은 오렌지호로 발생하는 이익금을 지역에 재투자 하고, 잉여 이익금은 어민을 위해 쓰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민과의 약속이라고 했다.&lt;br /&gt;김홍철은 전남 서남권의 미래를 위해 지금 보다 더 큰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 계획이 실현된다면 우리 지역의 경제 사정은 한층 나아질 것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현재는 검토 중이라 공개할 수 없고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면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amp;nbsp; &amp;lt;윤승현&amp;gt;&lt;/p&gt;...</description><category>비즈니스/경영</category><author>관리자</author><pubDate>2011-07-17 08:45:39</pubDate></item><item><title>그녀 이름은 ‘밸리’, 직업은 ‘댄서’</title><link>http://haenam.com/bbs/?tbl=human&amp;mode=VIEW&amp;num=4&amp;category=문화/예술</link><description>&lt;p style=&quot;margin: 0px&quot;&gt;그녀 이름은 &amp;lsquo;밸리&amp;rsquo;, 직업은 &amp;lsquo;댄서&amp;rsquo;&lt;/p&gt;&lt;br /&gt;
&lt;div&gt;&lt;img border=&quot;0&quot; alt=&quot;&quot; align=&quot;right&quot; src=&quot;/data/image/mkbyZ7xqDvRxFFNbNPZ7YOASxfDBTrXZ.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451&quot; /&gt;&lt;/div&gt;&lt;br /&gt;
&lt;div&gt;&lt;br /&gt;&amp;ldquo;정 선생, 이거 비싼 카메라인데 사진 한 장 찍어줄까?&amp;rdquo;&lt;br /&gt;&amp;ldquo;비싼 카메라면 사진 찍어야지.&amp;rdquo;&lt;br /&gt;&amp;ldquo;자, 예쁜 표정......&amp;rdquo; &lt;br /&gt;&amp;ldquo;선생님 사진 빨리 찍어주세요.&amp;rdquo;&lt;/div&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허연 수염을 기른 노인 아닌 노인과 과년한 처녀의 대화 내용이다. 주위에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면 남세스러운 대화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런 리액션은 정지숙 씨만 할 수 있는 표현 방법이다. 농촌지역에서는 말이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amp;ldquo;정 선생, 포즈가 너무 멋있어.&amp;rdquo;&lt;br /&gt;&amp;ldquo;선생님, 제가 애들하고 놀다보니 아직 어려서 그래요.&amp;rdquo;라며 빙긋 웃고 만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그녀는 댄서&lt;/strong&gt;&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밸리 댄서 정지숙. 명함에 적힌 그녀의 직업이다. 그녀는 에어로빅 강사, 스포츠댄스 강사, 밸리 댄스 강사 등 댄스 관련 자격증만 10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중 자신과 제일 잘 맞는 춤은 밸리 댄스란다. 그 동안 다양한 춤을 섭렵했지만 뒤늦게 접하게 된 밸리 댄스를 제일 좋아 한다고 했다. 그녀에게 밸리 댄스는 또 다른 한 줄기 서광이었으며 색다른 춤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유혹자였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밸린 댄스 불모지에 뿌린 씨앗&lt;/strong&gt;&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amp;ldquo;선생님, 지금은 밸리 댄스가 많이 퍼져있는데요, 제가 밸리 댄스를 배울 때는 먼 지역까지 가야했어요. 저는 대전에 가서 배웠거든요. 우리 선생님(제자)은 제게 배웠는데요 강사 자격증 따서 저랑 같이 학생들 지도해요.&lt;br /&gt;정씨는, 지금은 밸리 댄스의 동반자이지만 전에는 제자였던 박지혜 씨가 대견한 모양이다. &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박 씨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정지숙 씨에게 밸리 댄스를 배웠다. 그리고 그 당시부터 정 씨와 함께 행사에 공연 팀으로 참석하곤 했다. 그 초등학생이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어 선생님과 같이 다른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앳돼 보이는 얼굴, 나이는 성년이지만 얼굴은 영락없는 17살 소녀의 모습이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정 씨가 밸리 댄스를 시작할 당시 진도군을 비롯한 인근 지역은 밸리 댄스 불모지였다. 크고 작은 행사가 많던 시절이라 행사장에서 밸리 댄스 한 번 쯤은 구경할 만도 했었겠지만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전국에 밸리 댄스가 보급되는 시작하는 시기라 농촌지역까지 보급되기에는 시간이 좀금 더 필요했던 것 같다. &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이때 해성(?)처럼 무대에 등장한 밸리 댄서가 있었다. 어떤 때는 비슷한 연배의 파트너와 함께, 또 어떤 때는 대여섯 명의 초등학생과 함께 무대에 올라 육감적이고 현란한 몸놀림으로 관중의 호기심과 갈채를 받은 이들이 있었다. 그가 바로 밸리 댄서 정지숙 씨와 그녀의 제자들이었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화려함과 화사함 사이를 넘나드는 엉덩이 치마, 관객들이 아무리 눈을 돌려도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배꼽,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야리야리한 몸매, 그것들이 뿜어내는 격정의 몸짓은 유니크한 춤의 진수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이렇게 길거리 공연 수개월. 정 씨의 이런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밸리 댄스는 이제 각종 행사장에서 공연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정 씨가 밸리 댄스의 불모지에 밸리 댄스의 보급을 앞당긴 것이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밸리 댄스는 여자의 운동&lt;/strong&gt;&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amp;ldquo;선생님......, 처음에는 밸리 댄스하는 사람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무지 많아요. 아주머니들도 많아졌고....., 밸리 댄스하고 난 후 정말 만족하고 계세요.&amp;rdquo;&lt;br /&gt;그녀는 쑥쓰러운 듯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간다.&lt;br /&gt;&amp;ldquo;밸리 댄스는 괄약근 운동이라 여자들한테 너무 좋아요. 그리고 여자 배를 따뜻하게 해 주는 운동이라서 애 못 낳은 여자들이 얘를 가질 수 있어요. ......몇 년 동안 임신을 못했던 여자 분이 밸리 댄스를 몇 개월 하고 난 후 임신하는 것을 봤어요. 지금 밸리 댄스하는 아주머니들도 밸리 댄스하고 난 후 많이 달라졌다고 말해요.&amp;rdquo;&lt;br /&gt;정 씨의 밸리 댄스 예찬은 끝이 없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자신에게는 터키 스타일의 밸리 댄스가 더 좋아&lt;/strong&gt;&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정 씨는 &amp;ldquo;현재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밸리 댄스 동영상은 기본동작에서부터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amp;rdquo;며 &amp;ldquo;아마 협회가 달라 그런 것 같다&amp;rdquo;고 설명해 줬다. 정 씨는 또 &amp;ldquo;요즘은 동작이 큰 퓨전 밸리 댄스도 많이 보급되고 있는 것 같다&amp;rdquo;며 &amp;ldquo;자신은 터키 전통의 밸리 댄스를 더 선호한다&amp;rdquo;고 했다. 그래서 금년 8월에는 터키에가 가 밸리 댄스 연수를 할 계획이라고 귀띰해 줬다.&lt;/p&gt;&lt;br /&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trong&gt;&lt;br /&gt;
&lt;div&gt;&lt;img border=&quot;0&quot; alt=&quot;&quot; align=&quot;left&quot; src=&quot;/data/image/4FXP1ikyFcGay18gh8Vo4FH2.jpg&quot; width=&quot;300&quot; height=&quot;453&quot; /&gt;&lt;/div&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춤보다 마음이 더 예쁜 사람 &lt;/p&gt;&lt;/strong&gt;&lt;/p&gt;&lt;br /&gt;
&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amp;ldquo;선생님, 우리도 봉사활동 하러다녀요.&amp;rdquo;&lt;br /&gt;대화 말미에 정 씨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사실 그녀는 이전부터 지역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른 팀과 같이 활동하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lt;br /&gt;정 씨를 아는 사람에게는 별로 놀라운 말은 아니다. 기자가 이전부터 알고 있는 그녀는 이런 사람이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남을 배려하고 할 줄 알고 타인을 위할 줄 아는 속 깊은 사람이었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amp;ldquo;정 선생, 기사에 나오려면 사진을 찍어야지. 예쁘게 찍어줄게&amp;rdquo;&lt;br /&gt;&amp;ldquo;예, 옷이랑 다 준비해왔어요.&amp;rdquo;&lt;br /&gt;옷 갈아입을 장소가 마땅치 않았는데 식당 주인에게 부탁을 했나보다. 금방 밸리 댄스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그런데 밸리 댄스 복장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lt;/p&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br /&gt;그녀는 기자가 지정해 주는 장소에서 밸리 댄스를 춘다.&lt;br /&gt;카메라의 고속 셔터가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를 쓸어 담는다.&lt;br /&gt;음악은 없다. 음악이 없어서인지 그녀의 표정에서 쑥스러움이 묻어나온다.&lt;br /&gt;그러나 기자의 귀에는 밸리 댄스 음악이 들려온다. 격정적이고 강한 밸리 음악이 전신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듯하다.&lt;br /&gt;그녀가 미처 알지 못할 뿐, 그녀의 춤은 음악도 품고 있는가 보다.&lt;/p&gt;&lt;br /&gt;&lt;br /&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amp;lt;윤승현&amp;gt;&lt;/p&gt;...</description><category>문화/예술</category><author>관리자</author><pubDate>2011-07-17 08:44:55</pubDate></item></channel></rss>